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마크 A. 놀 지음 (서울: IVP, 2010)
스캔들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이 부정적인 뉘앙스의 단어가 어찌 이렇게 되었을까 싶은 현실이다. 이 단어는 카카오社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 이 의미를 더하여서 오늘 소개할 본서의 제목을 나름대로 해석해보자면, 복음주의라는 사조의 지적인면들이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을 맞이하였다고 읽어진다. 과연 그러한 것인지 어떠한 내용들을 다루는지 한 번 목차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1부. 스캔들
1. 오늘날의 스캔들 2. 이 스캔들이 중요한 이유
2부. 스캔들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3. 복음주의 지성의 형성: 부흥운동, 혁명, 문화적 통합 4. 복음주의적 계몽주의 5. 근본주의라는 지적 재앙
3부. 스캔들의 의미
6. 정치에 관한 성찰 7. 과학에 관한 사고
4부. 희망?
8. 복음주의의 지적 부흥은 진행 중인가? 9. 십자가라는 걸림돌
총 4부의 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서적이다. 그리고 본서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이 책은 복음주의 역사 전체를 다루는 책이 아니라 복음주의 지성, 특히 사회, 예술, 인간, 자연에 대해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려는 복음주의자들의 노력을 다루는 책이다. 179p.
또한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듯이 본서는 미국에 초점을 둔 책이지만, 전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13p.)이다. 더욱 나아가서 한국의 기독교적 구성 및 그 색깔이 다분히 미국적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로 하여금 지성으로 그분을 사랑하도록 격려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13p.)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둘 중의 하나만을 강조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단이 되거나 올바른 신앙과는 다소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며 다시 본서 안으로 좀 더 들어가 보도록 하자. 본서는 기독교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하여 복음주의 지성의 문제점을 짚어가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1장에서는 이에 대한 각 용어들의 정의와 더불어 미국을 위시한 북미권의 문화적, 사회적, 기독교적 양상을 다룬다. 2장에서는 이것이 왜 중요한지를 다루며 가현설과 영지주의, 반지성주의 등을 다룬다. 결국 반지성주의적 모습에 의해 가현설적인 혹은 영지주의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던 문제가 다뤄진다. 3장부터 5장까지는 미국 내에서의 각 시기별로 나타난 복음주의 모습들을 다루는데, 그 나름대로의 지성을 발전시켜나가는 모습에서부터 시작하여 지성을 무시하는 조류로 변화되는 것들이 알기 쉽게 그려져 있다. 다음으로 6장과 7장에서는 각각 정치와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특히, 미국적 상황에서의 복음주의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해야 할까.
이 장(6장)에서는 앞 장(5장)에서 설명한 근본주의적 성향이 비공식적이고 대중주의적이긴 했지만 의미가 있었던 19세기의 정치적 사고를 어떻게 왜곡시켰는지, 이런 성향이 지금까지 복음주의권의 정치적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 주고자 한다. (199p.) - 괄호 안의 장표기는 필자의 표기임 -
이와 같은 저자의 설명이 보다 자세하다고 생각되어지기에 적어 보았다. 그리고 7장에서는 앞선 시대의 복음주의자들의 과학에 대한 대응 - 베이컨주의를 받아 들여서 사용했던 것과 달리 – 다윈의 진화론 등과 같은 현대 과학에 대한 반동적 대응이 잘 나타나 있다. 조금 더 설명을 더하여 보자면, 과학이란, 그 시대의 그 상황에 가장 알맞고도 현명한 방식의 설명이다. 항상 뉴턴의 이론이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발견이나 증명을 통하여 기존 이론 또는 증명의 오류를 정정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어떠한 한 가지 이론에 매달려서 – 과학철학의 성경에 대한 무조건적 무비판적 이용과 같은 – 있다면 위험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8장과 9장에서는 복음주의의 지적 부흥이 즉, 긍정적인 방면으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다룬다. 그리고 마지막 장인 9장에서는 복음주의의 반지성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순기능으로 작용했던 부분을 다루며, 앞으로 더욱 더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희망적으로 그리며 마치게 된다. 특히, 기억에 남을 문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기독교 지성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지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322p.
하나님을 찾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말씀을 묵상함으로, 기도를 함으로, 성경을 연구함으로 말이다. 어느 한가지의 방식이 아닌 여러 기독교의 전통들을 돌아보면 각각의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만의 것이 최고가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기 위해 같이 간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미국의 20세기 복음주의자들의 지성은 자신들만의 방식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그들 주변에 있는 좋은 자원들을 같이 나누어 사용했다. 이처럼, 함께 할 때에 정말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 그 끝이 어디인지 알면서 나아가는 존재가 기독인이다. 세대주의자처럼 무조건적으로 종말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주신 지성을 사용하는 것조차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는 문장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조금 더 지성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싶고, 복음주의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하다면, 본서를 통하여 알아가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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