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 마이아 에켈뢰브 지음 이유진 옮김 (파주: 교유서가, 2022)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건물을 가게 되면 가끔이나마 마주하게 되는 이들이 있다. 될 수 있으면 고객과 마주치지 않는 동선으로 건물 바닥과 유리를 닦는 노동자. 때로는 선생님, 때로는 여사님이라고 불러드리는 여성 노동자. 과거보다는 나아졌겠지만, 아직도 노동으로서의 청소를 대우하기보단 저임금노동자라고 불리지 않을까 싶다. 그 근저에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기에, 기피 업종이라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성실함으로 삶을 지켜나가기 위함으로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은’ 이들이 존재하기에 건물의 청결함은 유지되고 날마다 누리게 된다. 선진국의 상징(?!) OECD 가입국의 21세기 모습.txt
이런 나에게 근본 선진국이라 생각하던 스웨덴의 20세기 모습을 마주할 기회가 생겼다. 우리보다 뛰어난 사회를 이루고 있기에 당연히 괜찮았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에게 세상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 책이 이번에 읽었던 작품이었다. 여성 청소노동자의 일기는 백야 현상처럼 나를 우울케 만들었다. 날마다 반복되는 아픔과 절망과 노동의 힘듦이 전이되듯.
어쩌다 보니 이혼하게 되고, 여러 자녀를 혼자 키우게 된 저학력의 어머니이자 여성이 마주한 사회는 녹록지 않았다. 그럼에도 살아내고 살아내려고 최선을 다한 그녀였기에 자녀들과 자신이 살아남은 게 아닐지 싶은 시대의 격동이 가감되지 않은 문장 속에서 만났다.
스치듯 지나가는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중동에서의 충돌 등 굵직한 세계의 아픔을 본다. 직접 피부에 와닿기 힘든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저자의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글로벌 시대의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개인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이른 시간에 일어나고 아무리 춥고 힘들더라도 일터로 나아갔던 그녀.
시간이 흐르고 노화가 느껴짐에도 나아갈 수밖에 없던 그녀의 해피엔딩을 문장에선 볼 수 없다. 다만, 책날개에서 그녀의 글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 위로가 되었다. 처절하게 힘들었을지라도 배우고 글을 썼던 그녀의 구원.
일기장에서 만나는 여러 축일과 그리스도교의 절기, 세계기독교협의회가 언급되는 게 유럽임을 알게 한다. 다만, 이런 흔적들을 제거하고 이름과 지명을 한글로 바꾸면 현대의 대한민국이라고 해도 믿겠다 싶은 겹침이 있지만.
얼마나 더 수없이 많은 노동자가 고도화되는 기술과 사회 앞에서 해고될까. 또한, 사회복지대상자라는 명칭 아래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신청 대상이 유지되기를 바랄까. 20세기의 북유럽과 21세기의 대한민국은 다르지 않았다. 또한, 세계는 이곳저곳에서 분쟁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철저히 낮은 곳에서 성실히 일하고 있다. 어쩌면 내가 믿는 예수님의 재림 장소는 다시금 낮고 낮은 청소노동자의 간이휴게실이 아닐지 싶다.

'시, 소설,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한 사람 (0) | 2024.08.09 |
---|---|
조각게임 (0) | 2024.07.24 |
지우고 싶은 시간도 선물이었습니다 (0) | 2024.05.20 |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0) | 2024.04.26 |
귀한 서점에 누추하신 분이 (0) | 2024.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