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그리스도와 신학적 예수 데일 C. 앨리슨 지음 (서울: 비아, 2022)
역사적 예수 연구를 관심 있게 보거나 ‘올리우신 분’과 같은 표현을 들어보았다면 이 책의 저자도 피해서 갈 수 없는 학자가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역서로는 아마 처음 들어온 저자이지만, 유명한 저자이니까 말이다. 슈바이처도 알고 슈트라우스도 아는데 앨리슨 모를 수 없다(아마도).
이와 관련해서 우 양 우 혹은 좌 양 좌의 입장만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면, 회색지대 같은 이들도 존재함을 알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좌와 우가 동일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 매우 다양한 톤을 자랑함도 알리라 믿는다.
성경을 통으로만 읽는 게 아니라 각각의 권으로, 문학 장르로 볼 줄 알아야 더욱 그 맛을 알 수 있으리란걸 이제는 안다. 그리고 이 성경을 연구하는 분들은 비평 장치를 통해서 파이널 텍스트로만 보는 게 아니라 그 근저에 담긴 의미를 찾고자 노력함을 아는 분들도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성경/성서 논쟁도 있고, 비평 논쟁도 있다.
아무튼 위와 같은 논쟁을 알든 모르든 좀 더 강력한 내용을 다루는 게 이번에 읽어본 저자의 글이지 않을까 싶다. 학계에서 논의되는 내용이 나오기에 선이해가 없다면 조금은 힘들 수 있는 부분도 포함되지만 그 무엇보다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경건한 불가지주의였다. 왜 그러냐고 물으신다면.
역사적 성서 연구의 자리는 설교 강단이 아니라 책상이다. 역사비평 연구는 교회를 위한 주석이다. 역사비평 연구의 역할은 정경 본문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정경 본문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112쪽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간에 우리의 신학을 확증해주는 역사적 예수는 현실 안주와 자기만족만을 가져다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예수, 우리를 편안하게 하고, 우리처럼 말하고, 우리의 의견을 칭찬하는, 길들여진 예수는 결코 예수가 아니다. 214쪽
성서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예수는 우리에게 한계점을 부여한다. 12살 이전의 기록을 찾을 수 없고, 요셉의 아들로서의 삶을 알 수 없고, 청년 이전의 모습도 알 수 없다. 또한, 그분의 많은 역사를 어떻게 세밀하게 적을 수 있었겠는가.
또한 정경화 과정을 통하여 확립된 성서를 통해서 우리는 그분의 모습을 본다. 신앙적이면서도 신학적인 의미가 담긴 그분을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알 수 없는 부분을 인정하고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책의 내용은 진보든 보수든 불편한 부분이 없지 않을 것이다. 저자 또한 어느 한쪽으로의 의견이 표명되기 때문에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저자의 표현대로 불가능한 것일 테다. 개인의 의견이 들어가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역사적 그리스도와 신학적 예수의 삶을 찾으려 노력하고 나아가리라 믿는다. 한걸음씩 나아가며 그분의 삶을 배우고 이해하는 게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믿는다.
'신학, 종교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교의 신 (1) | 2023.08.04 |
---|---|
현대 영국 신학의 흐름 (1) | 2023.07.29 |
스위스 개혁파 신앙 (0) | 2023.06.07 |
하나님 자녀들의 선교 (0) | 2023.06.04 |
교회에서 처음 배우는 주기도문 사도신경 (0) | 2023.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