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지음 (서울: 비아, 2016)
언어에 관련한 교양 과목을 듣고 과제로 에세이를 썼던 기억이 난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그런 에세이……. 그 경험도 어느덧 오래되었다. 그리고 다시금 성서를 통해서 그리고 그것을 묵상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단어의 의미, ‘나’와 ‘너’의 의미, 그리고 세월이 흐름으로 인하여 달라지는 언어를 돌아보게 된다.
구관이 명관, 구간이 명간 이런 말장난이 아닌, 의미를 돌아보고 싶기에 출간되었던 책들을 찾아보다가 한 번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지난달 초에 구매해놨던 책을 펴서 꺼내놓는다. 때마침 진행하던 챌린지 덕분에 더욱 유의미한 읽기가 되지 않을까.
언어는 그저 없어지면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그뿐인 단어들의 모음이 아니다. 언어는 각 공동체가 특정 현실과 마주했던 경험에 따라 형성된다. 언어에는 그 언어를 쓰는 공동체 고유의 가치가 담겨 있다. 19쪽
소중하게 다루어졌던 이야기들의 모음이 각 지역의 특색이 담긴 방언이 아니었을까. 교회를 이루게 되는 근간에도 그 교회만의 특징적인 용어 사용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전통보다 개교회주의(보다 더 정확하게는 개인화)를 지향하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기에 기존에 사용되던 언어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을 즈음의 도입부에서 만난 문장이었다. 조금 더 읽어 내려가니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났다.
가난한 이에게 무료로 옷이나 음식을 주는 일은 자비로운 행동이지만, 권력층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일은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했다. 우리는 배고픈 사람에게 생선을 줄 수는 있되 왜 그들에게 생선이 없는지는 물을 수 없었다. 32쪽
잠시 생각해본다. 사회복지학을 다시금 공부하면서 배우는 부분과 겹쳐지는 내용이 아닌가. 그리고 주변을 바라보면서 애써 멈춰왔던 물음표와 같은 삶이 주는 질문을 말하는 문장이다. 잘못된 무언가를 바로잡고 싶은 가슴 속 어딘가의 것을 꺼내는 질문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사회를 변화(혹은 변혁)시키기 위해서 행동할 수 있는가 아니면 기다려야 하는가라는 질문까지 가닿게 된다.
아,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은 언어에 대한 의미, 텍스트를 돌아보는 것이었지 다시금 마음을 진정시켜 본다. 그런데 마음이 진정되기 위해서는 부드러운 문장이었으면 하지만 명치 한방 맞는 느낌의 글을 읽게 된다.
애초에 죄와 구원이라는 말은 천국과 지옥이 있고 하느님이 사람들을 둘 중 한 곳에 보낸다는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만 제대로 작동한다. 34쪽
내가 말하는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알지 못하면, 무의미한(혹은 공허한) 외침밖에 되질 않는다. 복음이 아니라 소음이 되는 순간인 것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소중함을 잃고 싶지 않음에도 잃게 될 것만 같은 순간이 되어버린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책에서는 계속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나아가며 이야기 한다. 죄와 같은 단어의 의미가 시대와 세대에 맞게끔 불편하지 않도록 달라졌음을, 그래서 원래 말하려던 것과는 다르게 전달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서에 말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의료모델과 법률모델로 바라보고 이를 또 적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물론, 정신과 육체의 문제에 대해서 기적만을 바라고 적절한 의료적 조치를 취하지 않으라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마시기를). 어쩌면 우리는 기적을 더 이상 원하지 않고 우리가 이루어 내는 역사를 보시라는 것이 아닐까. 구원의 역사보다 우리의 진보를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아닐까.
그러나 죄는 실재한다. 또한 이것을 부인하지 않고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얼마 전 고인이 되신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께서 이끌던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아파르트헤이트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을 책에서 만나게 된다. 힘들지만 해야 했던 결단들, 죄에 대하여 이루어졌던 용서, 그러나 상처는 남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용서가 끝이 아님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용서는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117쪽
바로 이 출발점에서 우리는 구원을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구원이란 어떤 추상적인 상급이 아니다. 구원은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의 몸에 임하는 사건이다. 120쪽
우리가 잃어버린 언어의 의미를 다시금 찾아가기 위해서, 구원과 죄의 의미를 되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성서를 다시금 읽고, 그 읽음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다음의 말이 유의미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나 보다. 덮으며 다시 생각하게 되는가보다. 같은 끝맺음을 맺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우리의 절망과 희망을 담아내는 데 신앙의 언어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언어는 없다고 믿는다. 124쪽
다시금 교회가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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