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가고 있어 이요셉 지음 (서울: 두란노, 2019)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울 것 같으나 쉽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묻고 싶을 것이다. 이 모순적인 삶을 살아가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세상에서는 많은 희생과 고난이 따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를 수 있는 이유는 하늘 소망이 있기 때문이며, 나의 삶의 짐을 대신 지어주시기 때문이다.
본서의 저자는 이 땅에서 일반인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날마다 주시는 힘으로 나아간다. 위기청소년 혹은 청년들을 돕는 사역이란 쉽지 않은 결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주님이 주시는 힘이 있다면 누구나 가능함을 저자는 말한다. Sola Gratia!
이 땅에서 복음이 복음 되지 못하는 이유는 복음에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복음을 이야기하는 우리의 삶이 지독히도 세상을 닮아서일 것이다. 155p
가장 안타까우면서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저자의 말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본회퍼의 표현처럼 말하자면, 값싼 은혜로 만들어버리는 우리의 잘못이 아닐까. 예수님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다. 전도의 미련한 모습이 아닌, 우리의 삶 때문에 말이다.
분명, 우리는 세상의 흐름과 문화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좇을 필요는 없다. 보다 더 좋은 문화를 이끌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삶으로 증명된 복음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반대되는 모습을 보일 때 세상은 복음에 대한 가치를 느끼게 되어 있다. 149p
물론, 퇴폐적인 문화가 아니라면 우리는 따를 수 있다. 하지만, 문화가 아닌 삶의 모습이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면 우리를 믿을 수 있을까. 그들의 가치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의 본을 보일 때에만 충격으로 다가가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셨던 것이며, 그들의 제자들도 본받아 행하였기에 결국에는 로마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삶은 남보다 나만을 생각하게끔 만드는 경향을 갖고 있다. 나를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자의 지적처럼, 오로지 나만을 보게끔 만드는 사탄의 전략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소외되어가는 나의 이웃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위기청소년들은 우리가 시선을 외면하기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 기뻐하셨던 주님의 마음을 실천하고 있는 저자를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과거의 나의 모습과 지금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말이다.
과연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이웃은 누구인지 묻고 싶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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