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소설, 산문

바람의 신부와 치즈케이크

읽고쓰고나누고 2022. 4. 7. 23:36

바람의 신부와 치즈케이크 이숙경 지음 (서울: 엠오디, 2020)

 

산문집을 읽으면서 그리고 이를 어떻게 또 다른 글로 나눌 수 있을지 고민해본다. 저자의 문장을 대신해서 쓰는 것이 전달력이 있을까. 그렇다고 복사하여 붙여넣기처럼 하는 것이 글에 대한 도리가 될 수 있을까.

 

우연찮은 기회로 알게 된 작가의 글을 연속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행운이면서도 우려가 된다. 직접적인 앎이 아니라 문장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들이 통전적인 앎보다 실체 없는 그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처럼 될까봐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삶은 글에 묻어난다고 믿기에 오로지 글로만 만나고 싶은 딜레마에 빠진다. 알고 싶다. 그러나 온전한 앎을 글을 통해서 가능하고 싶다. 마치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처럼.

 

바람의 신부라는 책 제목의 일부를 보며 무조건 구매했던 나. <바람의 파이터>도 아니고 <바람의 나라>도 아니고, <바람의 신부>라는 그림도 아니지만 바람이 갖는 의미에 빠져들었던 것은 아닐까. 바람이고 싶다. 바람처럼 날아가고 싶은 삶의 현실이 날 괴롭게 하기에. 제목과 동일한 제목을 달고 있는 글을 읽다보면 나도 치즈케이크가 먹고 싶다. 아, 오늘은 초코 케이크를 입속에 털어넣었구나.

 

정신을 다시금 가다듬고 책을 살펴본다. 예전과 달라진 나는 겉표지의 일러스트를 감상한다. 누군가 여인의 얼굴을 만져준다. 아니, 쓰다듬어주는 모습으로 보여서 왠지 나를 위로하려는가 싶다. 위로가 필요한 현대를 살아가는 나를 돌아봐주는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위로가 필요함을 말하는 것 같다.

 

산문이니까 한 꼭지만 읽어도 되고, 뒤에서 앞으로 혹은 띄엄띄엄, 아니면 속독도 가능하겠지. 그런데 난 정독한다. 그리고 놓친 부분이 생각나서 빠르게 절반을 다시 돌아본다. 내가 놓쳤던 것은 오타일까 아니면 내 마음의 오류일까 돌아보는 시간. 그리고 책의 도입부에서 잠시 멈춤.

 

그리고 오늘, 아코디언 할아버지의 부음. 16쪽 「11월」 중에서

 

2020년 8월에 나온 책에서 만난 부고, 2021년 12월에 소식을 알게 된 故 심성락 선생님이 생각나게 만드는 문장. 나도 아이에서 청년, 아저씨 그리고 할아버지 어느덧 떠나간 사람이 되겠지.

 

음악은 공간적이면서도 시간적이다. 다시금 되돌려서 만날 수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입된 것이 녹음이라는 기술이지만, 기술이 나를 자유롭게 하는가. 작가의 말대로라면 오히려 고독을 가져다 준 것이 최신의 테크놀로지가 아닌가. 그래서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는다. 글을 읽는다. 읽고읽고읽고읽는다. 그러다보면, 음표와 쉼표처럼 문장과 쉼표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숨 좀 쉬라고. 그래, 너. 행간에 담긴 의미를 찾기보다 알려주기를 바라는 너에게.

 

그런데 나는 어떤 존재였나. 나는 무엇으로 규정될 수 있을까.

 

나는 천재도 물론 아니고, 그렇다고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지도 못하는 것 같다. 96쪽 「새벽의 빈 두레박」 중에서

 

보통의, 보통으로, 보통에서 살아가는 김평범씨 아닌가. 그럼에도 중산층의 삶은 신기루 같다. 가지고 싶으나 가질 수 없는 너라는 제목을 가졌던 뱅크의 노래처럼.

 

책은 산문집답게, 몰아치다가 살포시 말하다가 격렬히 외치다가 저만의 템포로 말을 걸어온다. 읽어봤으면 좋겠다. 작가의 세상에서 이질적이지 않은 나를 발견할 수 있기에 말이다. 다음의 문장이 맴돌게 되리라.

 

나는 밤마다 신신파스 만한 위로를 바른다. 157쪽 「문어체(文語體) 슬픔」 중에서

 

내가 구매한 책은 왼쪽에 도서관에 신청한 책은 우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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