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 알렉산더 슈메만 지음 (고양: 터치북스, 2021)
성찬, 예수께서 제정하신 최후의 만찬을 떠올릴 수 있는 그리고 기념하라고 하셨던 기억의 조각을 문자화했으며 하나의 예전으로 내려온 식사. 성찬에 대해서 여러 교파(교단이 아닌)에 따라서 바라보는 방향과 생각이 다르기에 더욱 어렵지만 신비함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전통입니다. 이 책은 그 중에서 동방 정교회 학자의 안내를 받아서 살펴보게 되는 내용입니다. 열두 제자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책의 구성은 열두 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려운 주제와 더불어 다른 교파 전통의 용어를 읽어간다는 것은 흥미롭지만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기념 혹은 상징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화체설과 같은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라고 해야 할까요. 더불어 예배가 시작되는 혹은 준비되는 과정에서부터 서양교회의 전통을 잇고 있는 이들에게 혹은 개혁주의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부분들이라 생각해 봅니다.
그나마 필자의 경우에는 전통을 중시하는 고교회적 요소가 남아있는 감리교이기에(실제로 고교회 풍의 예배를 드리는 곳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었기에) 거부감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어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다름은 책을 읽는 호흡에 있어서 조금은 긴 호흡을 갖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문장들을 몇 개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뭐래도 성례는 죄의 상처에 필요한 치료제다. 55쪽
함께 모여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아픔을 치유 받는 공동체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듭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어떤 사람들은 ‘이웃’으로, 다른 사람은 ‘타인’으로, 우리 및 우리의 기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심지어 우리의 ‘영적 헌신’을 방해하는 익명의 집단으로 느낀다. 겉으로는 ‘영적으로’ 성숙하고 ‘독실한’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기도를 방해한다면서 얼마나 자주 사람들의 모임을 폄하하고 한적한 예배실과 외딴 곳을 찾아 ‘군중들’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는가! 실제로 이런 ‘자아도취적인’ 신앙은 교회로서의 모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220~221쪽
특별히, 개인주의에 함몰된 현대의 사람들 중에서도 공동체주의를 지향한다는 그리스도인조차 파편화되고 개별화됨을 보여줍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타자’가 존재하기에 ‘나’라는 존재가 존재함을 알 수 있기에 ‘에클레시아’는 결국 개인의 신앙을 강화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문장이었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기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다. 385쪽
우리는 무언가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제도를 만들고 기관을 세우고 우리의 노력으로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모형 혹은 현실이며 이것은 예수를 통해서 이 땅에 들어온 위대한 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다시금 생각을 정리해 봅니다. 책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정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예전의 흐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확신을 품도록 도와줍니다. 학자가 쓴 글이기에 그리고 유작이기에 타교파의 글이기에 다소 어려울 수 있으나 끈기를 갖고 좋은 안내자와 함께 한다면 좋은 신앙의 도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무엇보다 ‘성찬’이라는 놓치기 쉬운 주제를 살펴볼 수 있는 적절한 기회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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