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요한네스 바이스 지음 (서울: 수와진, 2021)
책을 읽고 보통은 그 내용을 되새겨 보기 위해서 목차를 살펴보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의 목차는 매우 간단한 편이다. 서론-본론-요약-결론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용에 대해서 간략한 소개를 진행하려고 하는데 여기선 별 의미가 없다. 제목에서 나타난 것처럼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적혀 있는 글이며 페이지가 90쪽도 되지 않고 요약하는 장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저자가 다 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으며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이어질 것이다. 바로 예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생각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을 파괴한다는 의미로써 말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땅 위에 임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말 그대로 이곳을 뒤엎어 버릴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교리에 의한 학습된 결과인가 아니면 마땅하고 타당한 형태의 이해일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바울신학 혹은 요한신학에 의해서 만들어진 혹은 교회의 생활을 도와줄 교리에 의해서 알게 되고 배우게 된 것을 통해(렌즈처럼 활용하여) 성경을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일부분만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처럼 읽고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찰스 쉘던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책 제목처럼 어떻게(how) 하실 것인지를 떠올려야겠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예수의 또렷하고 심각한 경고와 또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그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은 부자로 살았고, 또한 많은 교회도 부를 간직했다. 그래서 나는 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음’, 즉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을 진지하게 고려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난하게 된다는 것은 기적을 믿는 것보다 훨씬 더 경건한 것이다. 나는 오히려 기독교가 예수의 이러한 관점들을 잠시 제쳐 두고서 온갖 종류의 해석과 ‘약화’를 통해서 이 말의 진지함에 타협하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58-59쪽
알게 모르게 우리는 부를 탐하고 있다. 맘몬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기에 이 자본(물질 혹은 부)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음을 알고 갈구한다. 그것도 필요한 만큼의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말이다. 분명, 오늘 주신 은혜에 족하며 살아야 할 텐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가보다. 이와 반대로 경건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청부가 아닌 청빈을 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갖게 만들었다. 특별히 현대인의 삶에서 추구하기 어려운 청빈을 말이다.
우리는 은혜가 임하고 세상이 지나가기를 기도하지 않는다. 87쪽
거꾸로 매달려도 이곳이 좋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과연 나는 주님의 다시 오심, 파루시아를 기대하는 자인가 아니면 염세적이고 물질주의인 욕망덩어리인가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작지만 알찬 이 ‘수와진’ 출판사의 고전을 읽으며 신앙의 고전이 무엇인지를 깨달아보는 것은 어떨까 권하여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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