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노라 말하며
시간이 그냥 멈춰주기를 바란다는 노래 가사가 흘러나오던 시절에 대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서 이 노래를 열창하던 젊은 날의 나와 너. 이제는 노래방은커녕 만나기조차 어려워진 친구라는 존재. 그저 안부만 메신저로 물어본다. “살아있나”라는 말로.
코로나 이후로 교회도 비슷한 느낌이 든다. 오프라인 모임과 예배보다는 비대면 예배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했던 모두였기에, 메신저로 ‘살아있는지’ 확인 받는 느낌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잠시 숨을 돌리고 즐겁게 조우하려고 했는데, 다시금 유행하려고 한다니 이럴 수가.
그러면서 자연히 예배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묻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드리는 예배는 정말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것인가. 참된 교회라는 것은 공간이 아닌 모임이라는데, 무형의 모임에도 교회가 성립되는가와 같은 신학적 질문들이 닥쳐오는 시간들.
성도들은 삶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고군분투하지만 아무래도 신학적 지식은 부족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며 노력하는 성도이기에 ‘교회를 교회되게, 예배를 예배되게’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예배가 돌아오나
화면을 바라보면서 드리는 것,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도 예배 아닌가. 혹은 사람을 의식하는 느낌은 들지 않더라도 카메라 렌즈를 쳐다보는 것이 상대방이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으리라 믿어야 하지 않나. 이웃의 아이들도 원격수업을 받을 때에는 화면으로 하는데 왜 예배는 그렇게 하길 두려워하나.
생각해보면, 우리는 교회에 가서도 스크린을 본다. 혹은 대형 LED나 TV를 보고 있지 않은가. 목소리로 설교를 행하고 있는 분을 직접 보는 게 아니라 화면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앉아 있는 교회 의자가 아닐 뿐인데 공간적인 차이는 무의미하지 않을까.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믿는 자들의 모임’이라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가정에서 모여서 바라보는 것도 모임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이어진다. 어쩌면 보다 더 초대교회의 느낌이기도 하다.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소규모의 인원이 모여 있으니까.
아, 그래도 교회를 가서 현장예배 드리고 싶은 것이 보통의, 일반의, 오래된 신자의 모습이긴 하다. 그리고 모인다는 것이 지금의 시대의 흐름과 다르게 전통적이어서 좋다. 공동체성이 사라져가는 시대라서 더욱 그렇다.
모이기에 힘쓰기보다는 각자도생을 택하길 좋아하는, 아니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기독교는 어떤 의미로 남을 수 있을까. 믿는 바를 삶으로 나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케 된다.
본회퍼가 그립다
잠깐 멈춰서 생각하니 시대의 흐름에 갇혀서 다수의 인물들이 자신과 다른 선택을 했던 본회퍼가 떠오른다. 남들과 다르게 살았고, 최선을 다했으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죽음을 맞이한 인물.
그러나 그에게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날마다 문 앞에 서서 두드리시던 분을 만나기 위한 여행으로의 출발과 같았으리라. 그는 고대하던 만남을 누렸을 것이다. 믿음의 선택을 신뢰하면서.
코로나로 모이기를 자의든 타의든 멈추게 되었다가 다시 모이는 이들. 그들에게는 어떤 고백이 담겨 있을까. 그리고 나에게는 어떤 고백이 남게 될까. 신자의 고백은 어떠해야 할까. 예배도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 말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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