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종교학

두렵고 황홀한 역사

읽고쓰고나누고 2020. 12. 5. 15:42

두렵고 황홀한 역사 바트 어만 지음 (서울: 갈라파고스, 2020)

 

  바트 어만의 책을 참 오랜만에 읽게 되었습니다. 『성경 왜곡의 역사』를 보며 사본학과 성서비평, 그리고 정경화 과정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던 기억이 남아 있기에 그의 통찰은 저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게 될지 궁금하였습니다. ‘죽음의 심판, 천국과 지옥은 어떻게 만들어졌나’라는 도발적인 부제를 가지고 있기에 어쩌면 두렵고 떨림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주장으로 글을 열어갑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개념들이 누군가 만들어 낸 것이며 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저렇게 변해 왔다. 13쪽

 

  위와 같은 논지를 증명하기 위하여 14장에 걸쳐서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중요한 인물과 더불어 그들의 저작물을 다루는 형태로 여정을 펼치게 됩니다.

 

  1장에서는 에녹1서와 베드로묵시록의 발견 이야기, 즉 사해문서라는 이슈를 통하여 시작됩니다. 또한 페르페투아의 수난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사후세계에 대한 일반적 이해(고대를 포함하여)와 기독교인의 이해를 비교하여 주며 도마행전을 간략히 소개한 뒤 그 내용 중에서 2개의 임사체험을 이야기합니다(여인의 지옥 경험과 왕의 형제의 천국체험). 4개의 사후체험 이야기를 통해서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이기에 어쩌면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충실히 하라는 저자의 숨겨진 의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어지는 2장에서는 셰익스피어를 인용합니다. 죽음의 과정이 아니라 그 상태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여주며, 성경에서의 모습을 특별히 시편에 나타난 스올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이에 따라서 현대인들의 논리인 ‘생각하므로 존재한다고 느꼈던 우리가 존재하지 아니함’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그 유명한 길가메시 서사시가 나오며 그 내용은 우울한 죽음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이와는 다른 모습으로 죽음을 대하는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파이돈(물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저작을 남기지 않아서 플라톤에 의하여 어느 정도 본모습과는 다른 형태로의 표현이 이루어졌겠지만)을 통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영하던 모습을 봅니다.

 

  3장에서는 ‘사후 세계 이전의 사후 세계’라는 제목인 만큼, 목적 없이 존재하는 상태들의 영혼을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서 살펴보도록 합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통해서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멈출 수 없는 기관차와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그런 생각을 가져봅니다.

 

  4장에서는 플라톤이라는 위대한 철학자를 봅니다. 그리고 플라톤이 기독교의 사후세계에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줍니다(파이돈을 중심으로 하여 권선징악적인 모습과 국가론의 에르 신화를 통해서). 또한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 이야기, 루키아노스의 풍자, 에피쿠로스의 죽음에 대한 이해, 루크레티우스의 실제의 본질에 대한 견해(원자에 대한 그리고 정신에 대한 이해는 그 시대의 사람들과 비슷한)를 통해서 영혼 혹은 정신에 대한 불멸성을 생각해봅니다.

 

  5장에서는 드디어 기독교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유대교의 성서를 토대로 사후 세계를 살펴봅니다. 스올에 대한 이해와 히브리 성서 내에 있는 내용들을 두루 살펴보며, 그리고 예언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토대로 설명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삶의 자리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되어지는 죽음에 대한 이해를 볼 수 있습니다.

 

  6장에서는 부활의 개념을 그려냅니다. 특별히, 묵시론적 사고의 등장(예언자적 혹은 고전적 관점보다 발전된)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신정론이라고 부르는 악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 촉발시킨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플라톤적(그리스 방식의) 불멸성과 유대교적 불멸성의 비교를 합니다. 완전히 다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유대교의 특수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닌 방법으로 합니다. 틀린 것과 다른 것의 차이라고 해야겠습니다.

 

  7장에서는 중간기라고 부르던(지금은 제2성전기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고대 유대교의 역사를 살펴봅니다. 마카베오기의 내용과 에스라 4서의 내용을 그리고 아브라함전서를 다루어 봅니다. 그리고 종교학자로서 역사학자로서의 성찰을 통하여 읽는 저에게 질문을 던져줍니다. 고대인들의 삶의 기록에는 자신들(지식층 혹은 상류층)의 기록은 정확할지 모르나 그 당시 삶을 살아가던 대다수의 무리들, 즉 서민에 대해서는 정확한 설명이 불가능했습니다.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을 오독하며, 무시하였던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서 사회과학적인 탐구를 통해 분석하였겠는가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8장에서는 기독교의 중심인물인 예수를 통해서 사후세계를 살펴봅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예수는 사람이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심판의 날이 곧 올 것이며 그때에 하나님이 모든 악한 것을 멸하고 죽은 자들을 되살려 악한 자는 벌을 주고 믿음 있는 자들은 상을 줘 하나님의 영원한, 낙원 같은 나라에 데려갈 거로 가르쳤다. 231쪽

 

  또한 신약학을 전공하였던 학자로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는 다르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사후 세계에 대한 예수님의 주장은 후대에 삽입된 구절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어지는 9장에서는 사도 바울의 사후 세계관을 살펴봅니다. 바울의 사후 세계관은 기독교의 발전인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인지를 질문합니다. 로마서를 필두로 하여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서 15장(부활 장이라고 불리는 이장의 기존의 잘못된 이해를 교정: 부활의 변증이 아닌 전제를 하며 논지를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저자는 봅니다.), 고린도후서 5장, 그리고 빌립보서로 이어지는 바울의 부활에 대한 이해의 변화는 삶의 궤적과 같이 한다고 주장합니다.

 

  10장에서는 복음서 내에서의 변화점을 살펴봅니다. 예수님의 묵시론적 가르침이 비묵시적으로 그리고 외경에 이르러서는 반묵시론적으로 변화되는 현상을 주요히 들여다봅니다(유대인의 헬라화, 당시대인의 그리스 교육에 따른 영혼에 대한 불멸의 이해가 더해져서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수평(적 이원론)에서 수직(적 이원론) 개념으로 그리고 사후상벌의 개념으로 변화됨을 보게 되며 특별히, 누가복음(중에서도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서), 요한복음(의 나사로를 살리는 장면), 도마복음을 살펴봅니다.

 

  11장에서는 요한계시록이라는 묵시문학 장르의 특성을 개괄하며 상징들을 살펴봅니다. 로마와 네로에 대한 의미로 그리고 종말에 대한 저자 특유의 해석으로 그리고 서사로 보는 계시록에 대한 이해도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12장에서는 이러한 사후 세계관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벌어진 이교도의 조롱과 이에 대한 변증가들의 활약을 보여주며(켈수스를 논박하는 오리겐, 클레멘스1서의 저자, 아테나고라스, 아우구스티누스), 내부에서 나온 공격(가현설적인 영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는 영지주의)도 반박하였던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육의 부활을 주장한 이들의 내용을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중간 상태를 다룹니다(바울이 생각한 즉각적인 변화가 아닌).

 

  13장에서는 결국, 신정론적인 질문이 제기된 상황에서 이그나티우스, 폴리카르포스, 키프리아누스의 글, 바울묵시록으로 고문과 그 후에 있을 영광, 황홀경을 설명해보며, 철학적인 사색을 통하여 보다 합리적인 방식으로의 영생을 신국론을 통하여 아우구스티누스가 증명하려 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신정론적인 질문이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나이 많은 성도들 그리고 순교와 더불어 가족의 부활을 기다리는 신자들의 요구에 대한 대응으로써 일어난 모습들입니다.

 

  마지막 14장에서는 다시금 신정론의 주제로 돌아오게 됩니다. 중간 상태에 있는 자들을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어 등장하게 되는 연옥의 개념적인 모습과 공포까지를 이야기하며, 여자와 여자의 기도가 갖는 힘의 일례로써 「테클라행전, 앞서 등장했던 페르페투아 수난 중에서 피부암으로 일찍 죽은 동생 디노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에 의해서 촉발된 어쩌면 모든 사람의 구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던 일부의 사상은 결국 오리겐으로 이어진 것을 보여주며, 이레나이우스까지 나타납니다. 또한 초기 기독교에 얼핏 보기에 남아 있는 윤회 사상들을 보게끔 만듭니다. 마지막으로 그레고리우스의 이야기, 니고데모의 복음서까지 이어지는 모든 이들의 구원을 향한 가능성을 담아냅니다.

 

  나가는 말에서 저자의 입장은 ‘천국도 지옥도 없다’로 축약됩니다. 그럼에도 만약이라도 존재한다면 천국은 있지 않을까라고 합니다. 합리적인 이유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지론의 입장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고 다시금 돌아올 수 없기에 저자 자신의 생각을 담으며 이 책은 끝을 맺게 됩니다.

 

  엄청 길도록 내용을 요약해보며 읽었던 책을 다시금 떠올려 보면 4장에서의 고대인들의 묘비명을 생각해보도록 만들어주는 부분이 재미있습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게끔 만들어주는 부분이기에 그랬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필멸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며, 이와 반대로 불멸이라는 단어도 의도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저자의 위트 있는 언어유희도 기록해 놓을만합니다.

 

여러모로 기독교의 지옥Hell 개념은 “헬”레니즘에서 온 셈이다. 361쪽

 

  또한, 저자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도 오히려 일반 복음주의자들보다 더 복음적이지 않나 생각하도록 만들어줍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항상 인생이 살맛 날 거라고, 이 땅의 삶에서 많은 보상과 혜택을 얻을 거라고 생각한 기독교 복음주의자들과 노선이 달랐다. 오히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시종일관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도라면 그의 현재 생이 박해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음을 강조한다. 273쪽

 

  지금 이 곳에서의 삶이 윤택하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은 아닐지 그리고 죽음 이후의 삶을 대비해서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지 않은 사람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고대 문헌들을 통해서 그리고 기독교의 성경과 외경, 위경, 편지들을 통해서 살펴보는 풍부한 함의는 무엇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인지를 돌아보게 만들어줍니다.

 

  물론, 저자의 주장에 전부 동의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도발적인 주장을 펼치는 저자에게 보수적이며 정통을 자처하는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모습을 보여야할까라는 고민을 던져줄 것입니다. 다만, 나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음식이 아닌 강한 것도 먹을 줄 알아야 하기에 좀 더 신앙적 표현으로 하자면,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해보는 것은 어떨지요.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성서에 대한 풍성한 이해를 더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권하여 드리며

 

<출판사의 이벤트 당첨으로 제공받은 책으로 서평을 진행하였습니다>

 

반짝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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