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종교학

신 없는 사람들

읽고쓰고나누고 2025. 2. 10. 01:42

신 없는 사람들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이철민 옮김 (서울: IVP, 2012)

 

교회에 젊은이가 없다고 난리다. (사회라고 별반 다르지 않지만) 소위, 다음 세대가 보이지 않는다고 외치는 요즘, 많은 이가 여기저기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사실 답은 멀리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말이다. 통계를 찾아보면 예전보다 줄어든 종교 인구와 교세를 보게 되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유럽과 북미로 시선을 돌려 보아도 줄어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받곤 한다. 통계 수치를 면밀히 살펴보는 분이라면 무언가 느낌표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읽어본 책은 한국에 소개된 지도 10년이 넘었지만, 그 간극만큼 사회가 커다란 (혹은 유의미한) 변화를 가졌다고 느끼진 못하였다. 책의 표현으로 ‘새로운 무신론’이 강렬한 인상을 보였지만, 그다지 와닿지 않는 공허한 외침과 같달까. 오히려 내겐 전통적인 무신론이 신사적이고 좀 더 현실적인 느낌이었다.

 

흔히, 기독교계에서 사용하는 과학과 과학주의를 구분해야 한다고 하는 표현이 있다. 과학의 겸손함과 다르게 과학만을 신봉하는 이들을 주의해야 한다고 할까. 책에서 만나는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이야기처럼, 과학은 무신론에게도, 유신론에게도 동일한 위치에 서 있을 뿐이다.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을 검토하려고 하는 일이 정당한 방법론은 아닐 테니까.

 

책은 ‘새로운 무신론’을 소개한다. 그리고 태생의 한계점을 이야기하고 4명의 주자를 다룬다. 그들의 과학적, 철학적 업적을 비판하는 게 아닌, 무신론에 대한 섹션을 집중적으로 바라본다. 체리피킹이나 확증 편향과 같은 내용을 이야기한다.

 

그들이 말하는 역사에 있어서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암흑과 같은 일들을 외면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아름다운 일들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원서가 발간된 시기의 서양 사회에서의 화두였던) 911테러가 종교의 존재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 악의 존재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종교에 있는 게 아니냐고.

 

18세기 계몽주의가 종교와 신정 통치의 독재로부터 서구 사회를 해방시켰다고 한다면(새로운 무신론자들의 변증에 있어 표준적인 요소), 20세기는 무신론적 대안 사회의 폭력과 잔혹성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102쪽

 

책은 종교의 폐해로부터 구원받았던 18세기를 보여 준다. 또한, 인류의 이성이 일으킨 20세기의 핍박도 이야기한다. 시대의 명과 암을 숨기지 않고, 공정히 다룸이 과학과 철학과 역사가 말해야 하는 과학이 아닐까.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하나만 말하고 싶어 한다.

 

책에서 말하는 신앙인을 겸손하게 만드는 무신론의 질타를 기다리게 된다. 그저 근본주의적 무신론자가 아닌, 오류는 인정하고 수정하고 나아갈 수 있는 진화되는 (혹은 업그레이드 되는) 무신론을 기다리며.

 

그렇다고 제가 무신론자는 아님을 아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