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폰 하르낙
Ⅰ.시대적 배경
19세기 후반 독일에서 헤겔의 관념론은 급속하게 쇠퇴하고 있었으며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었다. 특히 칸트의 비판적 관념주의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성서 본문과 교리 역사의 연구에 역사비평학적 방법론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는 현대적 역사 연구와 함께 일어났다.
이러한 시대에 하르낙의 신학적 중요성을 “역사”에 대한 인식과 이해에 촞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틸리히에 의해 리츨 학파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된 , 교회역사가로서의 한사람이었던 하르낙의 생애와 신학적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Ⅱ.하르낙의 생애와 사상‘
아돌프 폰 하르낙은 1851년 5월7일 도르파트에서 태어났다. 1857년에 그의 모친이 사망한뒤, 1864년부터는 두 번째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 그의 아버지 테오도시우스하르낙은 신학교수로서 엄격한 경건주의 전통을 지닌 루터교인이었다. 그는 1869년, 부친 테오도시우스 하르낙이 교회사및 설교학 교수로 있었던 도르파트대학신학과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곳에서 모리츠 폰 엥엘하르트(Moritz von Engelhardt)에게 영향을 받아 역사 비평적 연구에 관심을 가졌으며, 교회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의 방향으로서 학문적 관심을 가지게 된다.
1872년 라이프치히로 옮겨와 학업을 계속하던 하르낙은, 1873년 영지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년 만에 같은 주제의 논문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강사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2년 뒤인 1876년에는 라이프치히 대학의 부교수가 되었고, 28세 되던 해인 1879년에 기센대학 신학과의 정교수가 되어 리츨의 신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 후, 마르부르크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도 정교수가 된다.
하르낙은 「교리사」,「고대 기독교 문헌사」,「기독교의 본질」,「최초 3세기 동안의 기독교 선교와 확산」등의 책들을 출판하였다. 1921년 정년퇴임을 하고, 1930년 6월 10일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일로 하이델베르크 여행 도중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신학적인 업적
1873년부터 1912년까지 많은 종교 논문을 썼으며, 사회적인 복음을 주창했다. 19세기 독일교회에는 더욱 고도화된 성서비평학이 왕성했으며, 성서(성경)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역사비평적인 방법이 표준화되었다. 이는 모두 하르낙의 업적을 따르는 것이다. 하르낙은 초대 기독교 문서들에 대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캐내었으며, 초대 교회의 교리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요한 복음서를 배척하고 공관 복음서를 중시했다.
신학적 특징
하르낙의 신학적 특징은 인간중심의 신학이다. 하르낙의 기독교 본질 탐구에는 칸트와 괴테와 리츨의 규범이 작용하였다. 칸트의 도덕주의의 영향으로 하르낙은 인간을 위한 가치를 강조하게 되었고, 종교를 거의 윤리적인 것으로 규정하게 했다. 하르낙의 역사적 전망의 형성에는 괴테의 낭만주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도르파트에서 알렉산더 폰 외팅겐(Alexander von Oettingen)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괴테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되었다.
하르낙이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개념을 형성함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은 리츨이다. 리츨학파의 한 사람인 하르낙은 형이상학적 사변의 거부, 기독교의 역사적 해석에 대한 열정, 기독교의 규범과 본질은 종교개혁을 거쳐 그 기원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찾을 수 있다는 확신,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 성격에 대한 강조 등에 있어서 리츨을 따랐다.
교리사 연구
리츨학파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인 아돌프 폰 하르낙은뛰어난 교리사학자로 그는 1886「교리사」제1 권을 세상에 내놓음으로 자신의 신학을 펼쳐 나갔다
교리사」를 통하여 하르낙은 최초 6세기 동안의 교회사 및 교리사를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여기서 원시 기독교의 관점에서 후대의 역사를 판단하고자 할 때 적용되어야 할 기준들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가 1900년에 발표한「기독교의 본질」을 통하여 그 기준을 적용하였다. 따라서 그의 관점은, 고대 역사의 영역을 통하여 모든 문제들이 해결 될 수 있음을 주장하며, 그 역사적 인식이 현대 신학을 위해서도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교회에서의 신학적인 의견 대립을 해소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전통을 바르게 깨뜨릴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론
하르낙은 예수의 가르침을 하느님 나라와 도래,성부와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 더욱 숭고한 정의와 사랑의 계명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 나라는 영원하다고 보았다.
사도신조 수용논쟁 참여
근대 유럽교회에서는 사도신조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사도신조가 정말 사도로부터 계승(사도적 전승)되었는지, 기독교 교리를 충분히 설명하는지, 신화적 표현들을 기독교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든 것이다. 정통주의기독교인들도 사도신조의 교리적 불충분성이 지적했다. 결국 1871년 세례 집전시 어느 목사가 사도신조를 사용하지 않아, 성직을 해임당할 정도로 사도신경 수용논쟁은 독일 개신교회내에서 치열해졌고, 아돌프 폰 하르낙은 이 문제에 대해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사도신조를 대신한 신조(Creed)를 가져도 된다고 보았으며,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비롯한 일부 내용에 대해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일부에서의 해석과는 달리, 사도신조 수용에 대해서는 반대한 것은 아니다 .단지 사도신조의 문자적 해석을 해야만 믿음 좋은 신자이거나 성숙한 신학을 가진 것은 아니며, 사도신조의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 동의한다면 기독교인으로 남을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사도신조 수용을 강제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 것이지, 사도신조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저서-「기독교의 본질」
이 책은 하르낙이 1899년에서 190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학기에 베를린 대학에서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이라는 제목으로 16회의 공개강의를 했던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당시 600명이라는 청중들이 몰려들었으며 책으로 출판된 지 4개월 뒤에는 이미 10,000명의 독자들이 그의 강의를 책으로 접했다. 일 년 뒤 독자는 25,000명으로 늘어났고, 1927년에 4판이 발행되고, 14개 국어가 넘은 언어로 번역된 뒤에는 100,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제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의 저서는 큰 반응을 야기 시켰으며 이어서 그에 대한 지지와 비판을 실은 많은 논문과 저서들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이 책이 1차 세계대전 이전의 교양층에게 중대한 의의를 가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의 이야기에 대중(bourgeois)이 이토록 열광했던 이유를 알고 싶다면 우선 그의 강의의 내용이자 그의 대표 저서인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한다.
「기독교의 본질」의 내용
하르낙은 복음과 교리를 알맹이와 껍질로 비유하여 설명함으로, 교리들을 제거해야만 기독교의 본질인 복음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기독교의 본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복음’과 ‘역사 안의 복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알맹이는 복음이고, 껍질은 복음이 필연적으로 연루될 수밖에 없는 그러나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되는 역사를 가리킨다.
1) 복음
그는 전반부에서 예수의 메시지를 서로 관련되는 세 개의 주제로 정리하고, 후반부에서는 복음과 현대적 문제들과의 관계를 다룬다. 이 세 개의 주제가 그가 말하는 기독교 본질, 기독교 진리의 내적인 형태인 예수의 설교이다. 그가 예수의 설교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세 주제 속에 총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도래
둘째,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
셋째, 더 나은 의와 사랑의 계명
그는 이 사상을 말하면서 전적으로 공관복음의 예수상을 염두에 두었다. 하르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 바로 각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통치이며 그것은 권능을 지니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가 볼 때 예수의 선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역동적이고 도덕적인 관계를 맺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영혼에 받아들일 때 인간이 도덕적으로 무한히 올라갈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나라란 신과 그 신의 나라의 구성원인 영혼이 용서와 받아들임과 사랑의 관계에 있는 상태를 말한다.
하르낙에게 있어서 특별히 더 강조되며 ‘복음 안에 있는 복음’이라 불리는 부분은 두 번째 영역인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이다. 이것은 복음의 요약이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부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식이 있다는 것은 곧 인간을 경외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예수는 각 사람에게 자고한 가치를 부여했으며 그 자신이 ‘복음의 인격적 실현이며 힘’이었다.
세 번째 주제 ‘더 높은 의와 사랑의 계명’은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을 이야기한다. 예수는 종교와 도덕을 결합시켰으며, 이런 의미에서 ‘종교는 도덕의 영혼이요 도덕은 종교의 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르낙은 대부분의 리츨학파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웃 사랑으로 고취된 공동체를 건설하는 윤리적 과제를 예수의 복음이 지니고 있는 필수적인 내용으로 보았다. 이 속에는 당시의 신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낭만적인 ‘돌봄과 사랑의 예수’상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2) 역사 안의 복음
하르낙은 복음 자체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복음은 발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가 강조하는 바는 ‘복음’ 그 자체이지만, 그는 역사 안의 복음도 중요하게 보았다. 복음이 문화적 진보 전체에 동참하며 효력을 유지해 왔고, 또 언제나 거듭해서 자신을 관철시켜 나가고 있다는 것을 바로 역사 안의 복음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바울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 ‘예수가 전한 복음’을 ‘예수에 대한 복음’으로 바꾸어 교회의 초석을 놓았고, 초대 기독교에서 힘을 유지하고 있던 복음은 껍질이 자라나, 다시 말해 교리가 계속해서 다듬어지며 복음 속에 침투함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본래 가지고 있던 생명력을 잃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단순히 왜곡된 것이 아닌 완전히 전도된 것이 되었고, 그러므로 하르낙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복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복음과는 근본적으로 상반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껍질 안에 갇힌 복음이 다시 본래의 자리를 회복한 것이, 2세기부터 현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위대한 운동이라고 그가 평가하는 ‘종교개혁’을 통해 나타난 개신교 안에서였다고 주장한다. 종교개혁은 기독교를 본질적인 요소들로-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으로- 단순화 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회복된 것을 다시 잃게 될 위험성을-개신교의 가톨릭화를-말하며 종교개혁의 원리인 복음을 보존할 것을 호소한다.
3) 한계와 의의
하르낙은 「기독교의 본질」을 통해 교회의 뒤편에 숨어 있는 예수 자신의 본질적 메시지를 찾으려 노력하였다. 덕분에 그의 신학은 비기독론적이고 비교리적인 관점, 부활 체험의 무시,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에 대한 비종말론적 해석, 그리고 역사비평학적 환원주의로 인해 도전과 비판을 받았다.
기독교 본질은 역사비평학과 개인의 결단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던 트뢸치는 하르낙이 자신의 역사적 입장을 분명히 확인하지 않고 기독교의 본질을 규명하려 했다고 비판한다. 트뢸치는 기독교의 본질이 단순히 그 근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식과 공동체 안에 나타나는 계속적인 발전현상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트뢸치의 비판은 하르낙의 약점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의 단점은 그가 역사적 연구를 철저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복음의 불변성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기독교의 본질자체가 역사적 현상의 범주(역사의 산물) 안에 있는 것임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불트만 역시 이런 맥락에서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본질 자체를 묘사하지 않았다고 그를 비판한다.
또한 틸리히는 하르낙의 역사신학에 대하여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역사적 성격을 지닌 것들을 배제하고 기독교의 본질인 예수의 복음을 찾아내려는 하르낙의 시도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즉, 예수의 복음과 예수에 관한 복음인 신약성서 전체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고, 새로운 개벽의 세계를 가져올 분이라는 주장으로 맥락을 함께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러한 주장으로 예수와 초기 교회공동체, 바울, 요한이라고 하는 사이의 분열을 극복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틸리히도 마찬가지로 성서 안의 서로 다른 차이를 체계적으로 절대적인 의의를 갖고 해석했다는 하르낙의 역사비평적 관점을 비판한다.
하르낙이 시도한 것은 복음을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과학적이고 문화적인 개념들을 기독교와 종합했고, 기독교 복음을 현대화했다. 그는 계몽운동의 도전을 통해 기독교의 본질을 규명하려 노력했고, 그것이 기독교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하르낙은 「기독교의 본질」에서 역사적인 방법과 신학적인 동기와 기대를 보여주었다. 그는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신학적 객관성을 주장했고, 그것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록 역사비평적 방법을 철저하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역사를 통해 복음의 본질과 의미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고 주장한 점에서는 그 의의가 크다.
Ⅲ. 결론
- 나가는 말
하르낙은 방대한 연구와 깊은 통찰력으로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려고 하였다. 그는 복음과 교리를 구분하며, 교리들을 제거함으로써 기독교의 본질인 복음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독교는 역사적이지만, 복음은 불변하는 것이기에 껍질들을 다 벗어버리고 나면 순전하고 온전한 핵인 복음만이 남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교리와 복음, 예수에 관한 복음과 예수가 전한 복음을 구분 없이 섞어서 생각해 온 우리에게 기독교의 본질이 지닌 보편적이고도 객관적인, 변하지 않는 영원한 가치에 대해 다시금 경이로움을 느끼고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는 기독교의 본질을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만드는데 헌신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그가 추구했던 기독교의 본질이 지닌 영원한 가치 위에 무엇을 더하여 복음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
기독교의 본질은 그리스도 예수가 선포했고 보여주었던 하나님 나라의 나라이며, 동시에 인간 삶의 길을 보여주는, 당시의 새로운 시도였다. 이에 대한 증거는 성서이며, 교리는 그 본질에 대한 여론을 언어로 체계화한 것일 뿐이고, 신학은 그에 대한 해석이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이 역사 위에 있다. 또한 기독교의 복음은 역사적으로, 눈에 보이는 형식들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에, 마치 공기와 같이 우리의 곁에 숨 쉬고 있다. 그렇기에 복음은 우리의 어떤 지식으로도, 어떤 감정만으로도 온전히 파악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에 참여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 세계는 우리를 향해 열려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적 흐름 속에 있는 성서와 교리, 신학을 통하여 과거를 절대화하기 보다는, 그 셋을 통해 우리를 향해 열려있는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복음이 갖고 있는 하나님 세계의 미래는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어떻게 준비하고 열어나가느냐에 따라 우리를 향해 다가올 것이다. 결국 역사를 벗어버렸느냐, 시간이 흐르면서 입혀진 껍질을 입고 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모든 과거와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복음의 핵심을 찾는 노력을 계속할 것이냐 중단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닐까?
참고문헌
신학사상 119호.2002년 겨울호 "정용성 <하르낙과 기독교의 본질>
파울 틸리히.「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대한기독교서회
아돌프 폰 하르낙. 오흥명 옮김 <기독교의 본질>
제임스. C.리빙스톤 . 김귀탁 역.현대 기독교 사상사(下). 은성
수업시 진행되었던 아돌프 폰 하르낙의 이해를 더하기 위해 퍼온 자료